지구정착기

무엇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 줄까. 사람이 지구상의 다른 동물들과 어떻게 다른가. ‌쓸모가 있다면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인류의 본능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도전하는 것이 인류의 미덕이다. 호기심 많고 재주가 좋은 이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종을 수단으로 삼는 것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인간종은 다른 종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그렇게나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는 인류문명이란 것을 이룩했으며, 더불어 자유와 정의와 선의와 도덕과 같은 것들이 결국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특이한 종족이다.

야만의 시대

어릴 적 시골에서 개를 키울 때에는 마당에서 목줄을 채워 길렀다. 잔반 찌꺼기로 끓인 밥을 먹일 때나 개를 찾아 보곤 했다. 겨울엔 물그릇이 꽝꽝 얼고 여름에는 더위에 혀를 축 늘어뜨리고 누워서 숨만 헐떡이곤 했다. 큰 개들은 식용이나 투견용이였다. 작은 발바리를 키우면서 처음 강아지와 각별한 마음을 나누게 됐다. 어릴 때와 달리 이제는 동물들과 한 이불을 덮고, 따뜻한 물에 목욕도 시키며 옷도 사주고 장난감도 사준다. 그리고 지금, 이 동물들과 내가 어릴 적에 마주쳤던 그 동물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전봇대에 묶여 나무판자집에 살던 누런 개도 나를 보면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었다. 전봇대에 부딪혀 피가 났지만 절대 꼬리 흔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를 보면 너무나 반가웠던 그 개의 마음은 어느 누군가의 한 끼 식사로 사라졌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 동물들 덕에 사람의 생명만이 소중하다는 위험한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그들이 사는 세상은 여전히 잔인하다.


너의 의미 YO‌U‌R ‌M‌E‌A‌N‌I‌N‌G

너의 의미

‌만남의 충돌은 그 세기에 따라 흔적을 강하게 남기기도 한다. 누구에게는 하찮은 대상이 누구에게는 너 일 수 밖에 없는 특별한 대상이 된다. 캔버스 속 동물들은 관람자와 똑같은 눈높이에서 마주 본다. 이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가졌으며 사람과 똑같은 생명을 가진 주인공이다.

꽃들의 유산

‌고양이는 사람과 오랜동안 가까운 관계를 맺어 왔다. 사랑받기도 하지만 요즘의 도시생태계 안에서는 학대와 미움의 대상이 되어 그 존재가 너무 초라하기도 하다. 그러나 고양이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생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얼마나 위대하진 새삼 느낀다. 그 옛날 지구에 등장한 꽃은 곤충과 새를 불러 왔고 더 큰 동물을 먹여 살렸다. 그리고 우리 인간도 여기에 있다. 지금의 생물들은 어쩌면 모두 꽃들의 유산일지도 모르겠다. 


꽃더미 아래에서 UN‌D‌E‌R A P‌I‌L‌E O‌F F‌L‌O‌W‌E‌R‌S

꽃더미 아래에서

‌ 한 때 죽음을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은 그저 파랗고 바람은 마냥 상쾌했으며 조그마한 들꽃만이 내 세상의 전부인 시절이 있었다. 당장 땅바닥에 쭈구려 앉아보면 손톱보다 작은 꽃송이에 놀랍도록 다양한 모양과 빛깔들로 가득 찬 것을 보게 된다! 너무나 아름다워 따분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놀랍고 신기한 풀과 곤충들은 너무나, 너무나 많아서 어쩌다 밟혀 죽어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마치 이 엄청난 사람들 속에 나 하나 처럼 말이다.
 어째서 태어나는가. 어째서 살아 가는가. 이런 의문은 곧 어리석어 진다. 이미 태어난 후에 ‘없었더라면’하는 상상 따위가 무슨 소용 있을까. 태어났기에 죽는 것이며 살아있기에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이유를, 고통의 시작을 궁금해하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한 철이 지나면 물기 없이 메마른 그 꽃더미들에게 ‘어째서 여기 태어났느냐?’, ‘이렇게 사라질 것을 너희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나는 다그치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 곁에 머물 수 있어서 나는 내 세상을 사랑했다. 삶은 고통에 스러질지라도 풍부하고 다채로운 꽃망울을 끝없이 피울 뿐이다.


알콜중독 ALCOHOLISM

알콜중독

‌문득, 공포가 밀려 온다. 내일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니 그보다 당장 이 순간조차 어찌할 수가 없다. 정신은 혼란스럽고 앞이 깜깜해진다. 목구멍 안에서 미친듯한 절망과 원망의 외침을 수없이 삼킨다. 작은 위로 한 번 받지 못해 스스로를 서툴게 다독거린다. 마음에 폭풍이 일게 된 원인만 탓하느라 내면은 폐허가 된다.

여기에1, (돌과 실, 나무 막대, 가변 설치), 비디오, 1분 11초,  2013     

혼자 호수 모래밭으로 놀러 갔던 어느 어릴적 일이다. 새하얀 모래밭은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고 주변은 잔잔한 물결소리만 조용히 들려왔다. 호숫가를 살펴보다 아주 작고 까만 조약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갑자기 그 곳에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슬퍼졌다. 내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지도 몰랐을 이 작은 돌맹이는 언제부터 이곳에서, 얼마동안 있었던 걸까. 저 모래 위에 던져진 이 돌처럼 나도 세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만 같았다.

설치 된 돌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으면서 돌들만의 군집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막대 위의 돌멩이는 떨어질까 불안하다. 가느다란 실에 매달린 돌도 위태로워 보인다. 하지만 외부의 어떠한 큰 힘이 없다면 돌들은 그곳에서 떨어질 일은 없다. 만약 돌이 떨어진다해도 막대기를 탓할 것도 아니며 실을 탓할 것도 아니다. 돌멩이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그렇게 벌어진 일이다. 사람들도 그렇게 존재한다. 자신이 존재한 그곳에서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거기서 오는 괴로움은 필연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괴로움을 어느 탓으로 돌릴 것도 아니며 존재 자체를 부정할 일도 아니다. 사람은 실존하는 순간 불안함과 우울함을 그 속에 간직하고 살 수 밖에 없다.  간밤의 어둠 속에서 그냥 그렇게 있었을 돌이 대견하고, 쌀쌀한 아침에 차가운 이슬을 맞은 돌도 대견하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나 뜨거운 한 낮의 태양아래에서나 돌은 담담하다. 그래서 멋지다. 존재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을까. 묵묵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돌들을 볼 때마다 나도 하루하루 살아있음을 느낀다. '여기에'는 반드시 내가 있다. 세상 어느 곳에 있다 해도 결국에 여기에 내가 있다. 그리고 어릴 적 그 돌멩이도 지금 어디선가 분명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2, 유리병, 모래, 접착제, 7x3.5x3.5cm, 2015

‌삶의 의미는 스스로에게 오지 않을지 모른다. 내가 발견했기에 내게 의미가 생긴 그 조약돌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산다. 그렇게 나도 누군가에게 발견되길 원했나 보다. 언젠가 다 사라져버릴 이 세상에서 내가 잠깐 살았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기억해주길 원했나 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삶이 너무나 허무하고 슬플 것이다.
하얀색의 모래이지만 알갱이를 하나하나 골라내보면 각기 다른 종류, 다른 색깔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그 알갱이를 각각 골라내고 모아 본다. 그리고 뭉쳐도 본다. 모래는 점점 잘게 부서져서 먼지처럼 작아졌다 다시 서로 뭉쳐져 단단한 암석이 된다. 암석은 또 오랜 기간 동안 바위로, 돌로, 모래로 먼지로 잘게 부서진다. 이 끊임없는 순환은 사람과 닮아있다. 죽으면 세상에 아주 사라져버리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을 이뤘던 분자들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또 다른 존재의 분자가 된다. 아니 그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기억과 추억들이 다른 사람에게로 스며 들어 영원히 산다. 그런 면에서는 이 지구 안의 모든 존재와 우주의 모든 존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새벽, 장지에 먹, 나무막대기, 전등, 220x120cm, 2013

‌모든 것이 압박인 순간이 있다. 눈도 귀도 어두워지고 숨이 막힌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 이 세상은 나를 짖누른다. 먹이 전구를 짖누른다. 하지만 작은 전구는 단단하고 밝은 빛을 내 뿜는다. 그렇다고 검은 먹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먹은 여전히 전구를 위협한다.  그렇게 서로 존재한다. ‌


일러스트 ‌‌I‌LL‌U‌S‌T‌R‌A‌T‌I‌O‌N


종이인형 PAPER DOLL